'시사' 카테고리의 글 목록 :: 생각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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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텔레비젼을 보고 있던 중 쟈니윤이 지난 3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렸다.

쟈니윤의 전부인 쥴리아 리(좌)와 쟈니윤(우), 뉴시스, 여성조선

 

 

이 얘기를 듣자 문득 해맑게 웃으면서 안방 TV에서 우리에게도 많은 웃음을 주었던 '자니윤 쇼'가 떠올랐다.

기록에 의하면, '쟈니윤 쇼'는 KBS 2TV에서 1989년 3월 8일부터 시작해서 1990년 4월 5일 종영되었다.

 돌이켜보면,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의 일이다. 그땐 내가 1986년도에 첫 직장에 취직을 하여 서울에서 직장 3~4년 차 생활을 하던 때였다.

쟈니윤쇼는 매주 수요일, 목요일 저녁 11시 대에 했었는데, 직장에서 피로에 지친 몸을 끌고 퇴근하는 수요일과 목요일이면 늘 외식도 않고 좀 일찍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쟈니윤쇼가 내심 기다려 지기 때문이기도 했었다.

나 뿐만 아니라 그 당시엔 대다수의 직장인들이 그랬던 것같다. 시청률이 무려 40%를 훌쩍 넘었다. 굉장히 특이하기도 하면서 재미도 있었다. 쟈니윤이 했던 방식이 '스탠드업 토크쇼'라는 것인데 한국에선 쟈니윤이 처음 이었다.

그 당시 쟈니윤쇼는 용기를 잃은 자에게는 희망을, 지치고 힘든 자에게는 활력과 위안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위트가 있고 신선한 조크로 유쾌한 수요일, 목요일을 선사 했다.

 

 

자연의 순리

 

한번 태어나면 누구든 언젠간 한줌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필연적인 자연의 이치다.

잘 살았건 못 살았건, 부자로 살았건 가난하게 살았든, 권력이 있었든 없었든 간에 인간은 모두 죽음 앞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그가 떠난 지금 코미디계의 대부, 쟈니윤이 걸어 온 노정을 당시 팬의 한사람으로 반추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자니윤의 미국 입성

 

그는 1936년 10월 22일 충북 음성에서 태어났다. 1959 국내에서 방송계 대뷔하여 MC생활을 하다가 1962년 해군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에 간다.

제대 후에도 돌아오지 않고 그냥 미국에 눌러앉아 알바를 세개씩이나 하며 공부를 하여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교 성악과를 졸업했다.

본명은 윤종승이며 미국식 이름은 Johnny Yune 이다. 1964년 미국에서 코메디언과 MC 생활을 하다가 미국의 '텔아비브'라는 카페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스탠드업 코미디 양식을 개발 했다.

이때부터 그는 스탠드업 코미디가 미국인에게 먹힌다는 확신을 가졌다.

자극적인 소재나 욕설, 폭력 등의 천박한 방법을 전혀 쓰지 않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동양인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비하, 성적 풍자, 정치풍자 등에서 간결하게 툭툭 던지면서 넘어가는 식으로 미국인을 엄청 웃게 만들었다.

 

운명의 만남, 자니카슨

 

무명 코미디 생활 끝에 쟈니 카슨 쇼의 쟈니카슨의 제의를 받게 되고 총34회에 걸쳐 쟈니카슨 쇼에 동양인 최초로 출연하게 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우측)쟈니카슨쇼에 출연한 쟈니윤(왼쪽)

 

 

쟈니윤은 1973년 뉴욕 최고 연예인상을 수상했고, 《They call me Blues 》란 영화에도 출연하게 된다.

뉴욕에서 조금 인기가 시들해지자 활동무대를 라스베가스 로 옮기게 된다.

라스베가스에서 쟈니윤은 그보다 18살 연하인 이불가게 이브자리의 주인 줄리아 리하고 결혼 한다.

 

 

미국 스탠딩 코미디, 한국에 알리다.

 

명성을 쌓고 1989년 귀국한 자니윤은 KBS 2TV 에서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내 건 토크쇼인《쟈니윤 쇼》를
1990 년까지 한다.

그후 자니윤은 SBS TV가 방송 개국 기념으로 《쟈니윤 이야기쇼》프로그랭 진행하면서 쟈니윤은 브라운관으로 돌아와 메인 MC를 했다.

자니윤/남희석, 뉴스1db@News1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문화의차이때문에 그의 토크쇼는 생각만큼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SBS에서 하차했을 당시 다시는 토크쇼를 진행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브라운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쟈니윤쇼는 미국의 '쟈니카슨쇼', '데이비드 레터맨 쇼'형식을 그대로 들여온 토크쇼로, 진행자의 이름을 내걸고 매회 게스트를 초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본격적인 토크쇼라고 보면 된다.

사실 그 이전에도 '11시에 만납시다', '스튜디오 830', '가정저널' 같은 토크쇼가 있긴 했었지만, '11시에 만납시다'는 사회명사를 초대해서 얘기를 나누는 대담형식의 프로그램이라 오락적인 요소가 없다시피 했고, '스튜디오 830 '이나 '가정저널' 은 후의 '아침마당'과 유사한 형태의 프로그램으로 교양적인 요소가 강했던지라 본격적인 토크쇼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쟈니윤쇼의 특징을 보면 점잖게 덕담하는 식으로 시작하다가 갑자기 의표를 확 찌르는 위트로 사람들의 폭소를 자아내는 식이다. 순전히 재치와 해학만 갖고 승부하는 미국식 개그가 국내에서는 생소했으므로 1989년에 했던 '쟈니윤쇼'는 국민 대다수가 볼 정도로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그외에 그가 인기를 끌었던 요인은 그가 하는 야한 농담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국내 50대 중년여성 앞에서 그가 하는 농담은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수위가 아니었다.

 

문화차이를 느끼다.

 

좀 과하다 싶을 정도의 색드립을 할땐 약간 당혹스러웠을 때도 꽤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쟈니윤이 미국생활을 꽤나 오래 해서 생긴 어눌한 말투이기 때문이라는 이해와 또 한편으론 미국이 이렇다는데, 우리도 받아들여야지 하며 선진국의 새로운 문화에 대한 공감노력(?)과 신비감이 재미로 받아들여 진건 아닐까 싶다.

또 그런 자니윤 앞에서 여성출연자가 적잖이 당황스러워 하는 모습 같은 것들이 그것을 보는 우리나라 시청자들에겐 색다른 재미를 주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시청자들이 불편하다는 항의전화가 서서히 늘기 시작했고, 높으신분들을 건드리는 유머 등으로 족족 편집되는 사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쟈니윤도 이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되면서 자니윤쇼는 결국 방송 1년만에 폐지되고 말았다.

문화차이를 여과없이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따랐던 것일까. 비록 이 방송은 폐지되었지만 쟈니윤은 최초로 미국식 토크쇼를 국내에 전파시켰고 이후 '주병진쇼', '서세원쇼'등을 탄생시키는 등 한국 코미디문화에 큰 반향을 불러온 계기가 되었다.

 

 

가수 조영남(좌)과 쟈니윤(우), 뉴데일리/연합뉴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다

 

그는 쟈니윤쇼가 끝난 후에도 1991년 SBS 방송국 개국이후 ' 쟈니윤이야기쇼'를 촬영한 후 잠시 자취를 감췄다가 2002년 7월 14일 iTV 에 '쟈니윤 나이트쇼'를 맡아 게스트 조영남을 첫 초대손님으로 시작하게 된다.

이 프로는 2003년 1월 26일 까지 일요일 밤 10시 30분에 방영되다가 같은 해 2월 6일부터 4월 8일까지 11시 30분으로 옮겨서 하고 한국에서의 방송활동을 끝낸다.

1999년에 미국 LA한인타운에 이브자리가게 주인인 쥴리아 리와 결혼을 했다가 2009년에 이혼했다.

 

한국관광공사 선임감사를 마지막으로...

 

2014년 8월에는 한국관광공사의 선임감사로 임명받았으나, 기간 만료 직전에 2014년 4월13일 뇌출혈 발병으로 동년 6월에 물러난다.

한국관광공사에서 물러나게 된 쟈니윤은 미국으로 돌아갔고 그 후 치매를 않게되자,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근교 요양병원에서 생활해 오다가 2020년 3월4일 저혈압으로 병원에 입원한 후 나흘만인 3월8일 오전 4시(현지시간)에 향년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여러분, 이제 잠자리에 들 시간입니다."
그 유행어를 남기고 자니윤은 이제 잠자리에 들었다.

제가 직장 초년생 때의 신선하고 돌발적인 웃음으로 매주 수요일, 목요일을 기다리게 했던 쟈니윤, 각종 외설논란, 정치적 개그 논란으로 한때는 적잖게 힘들었을 쟈니윤, 이제 그 짐을 벗고 좋았던 기억만 갖고 부디 좋은 세상으로 가시길 빈다.

 

Mans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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